순환경제연구통신

제201312호 [통권 제141호]

2013년 4월 5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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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과 국민

북한과 중국에서는 헌법상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부르고, 남한과 타이완에서는 국민이라고 부른다. 국민이라는 말은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으로 성립한 중화민국의 혁명세력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국가를 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로 보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폐지하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때 사회의 주인은 자연인으로서의 인민(people)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을 담아서 인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같다.

물론 국민(national)과 인민이란 호칭의 더 깊은 역사적, 정치적 형성의 맥락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며, 여기서 그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3일에 서울극장에서 제주도의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을 관람하고서 느낀 점은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토 안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자연인으로서 생존할 권리가 없으며, 반드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데 승복하고 국민으로서 가입 등록을 해야만 생존을 허가 받는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제주도민들은 영화에서도 보듯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거의 자연상태의 주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조선이든 일본제국이든 국가는 저 멀리 떨어진 존재, 거추장스럽고 부담을 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거의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극히 빈약한 식량과 의복과 주거지를 가지고서 자연환경과 어렵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자연인들이었다.

그 동안 육지의 고려나 조선 정부도, 제국주의 일본도 이들을 수탈하기는 했지만, 자연인으로서의 생존 자체를 금지한 적은 없었다.

그러한 인민으로서의 생존 역사를 깨뜨리고 죽든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든지를 선택하라고 강압한 것이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세력이다. 이는 제주도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집행되고 드러났을 뿐, 그 당시 38도선 이남에서 이러한 양자택일의 선택이 모든 인간에게 강요되었고, 그때 국민을 거부한 사람들은 상당수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히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 것은 그들이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냥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육지 사람들보다 더 자연상태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것, 제주도라는 고립되고 폐쇄된 환경에서 국가 측 공권력이 모든 인원과 정보의 통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전략적 차원에서 미군정 당국이 이를 방조했다는 것 등의 이유가 있다.

결국 대한민국 안에서는 이 시기와 6.25 전쟁시기를 거치면서 땅 위에 그냥 자연인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되었고,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 그런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그 이전에 그런 역사가 이 땅 위에 있지 않았고,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국민이 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아이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슬≫은 사건의 전모 중에 단적인 한 토막만을 매우 절제된 화면으로 보여주었지만, 그 이면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암시적으로 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상에 성립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땅과 굳게 결합된 자연인을 완벽하게 멸종시키고서 만든, 자본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할 만한 인공(人工)적 모델국가로서 20세기에 탄생한 것이다. 대한민국 안에서 자본가들은 더 이상 땅을 빼앗고 파괴하는 데 존중해야 할, 자본이나 국가가 당해 수 없는 원주민을 만날 일이 없게 정리를 하고서 시작한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의 정부를 이룬 건국세력이 특별히 사악했다거나 그때 군인과 경찰이 잔인했다거나 한국의 자본가 세력이 욕심이 컸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아니다.

세계 2차 대전 후의 동서 냉전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계 인민들의 눈과 귀가 자신들의 일로 쏠려 있는 틈을 타서 식민지 지배와 태평양 전쟁을 통해 태연한 학살 기술을 터득한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자본주의 세력이 이상적인 시장국가라고 생각할 만한 대한민국과 타이완 중화민국이 성립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서양 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참히 내쫓거나 죽여 없애고 그들의 땅과 자원을 차지했다. 이는 지금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세계인의 이목이 잘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덕택에 우리가 값싸게 해외의 자원을 들여다가 낭비적인 생산과 소비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땅으로부터 뿌리째 뽑힌 인간들에게는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끝 없는 경쟁과 정복과 파괴로 달음질 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사는 방법을 생각할 수 없으며,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으면 우주의 다른 별로 진출하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자본주의화된 근대국가 시민들도 물질적 안락을 누리는 대가로 정신이 식민지화된 불쌍한 존재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위의 헌법 제1조의 두 문장은 사실상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의 선언은 자연인으로서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협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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