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연구통신

제201333호 [통권 제162호]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연구소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173번지 삼창 프라자 1522호. 전화:070-7767-5510 팩스 02-717-5510

“민생”이란 용어?

박근혜 대통령은 요즘 정치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여 있으면서 걸핏하면 민생을 이야기한다. 5.16쿠데타 지도부가 내건 포고문 제4항이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박근혜가 말하는 민생은 그들이 썼던 민생고(民生苦)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중화민국을 건국한 손중산의 삼민주의가 말하는 민생주의는 사회주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당의 민생주의의 목적은 사회의 재원을 균등히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생주의는 사회주의이며 또한 공산주의인 것입니다….인민은 국가에 대해서만 공산이 아니라 사업이나 권리에 대해서도 共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민생주의의 목적이 진실로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희망하던 대동세계인 것입니다.”

군사쿠데타의 주동자 박정희와 그의 일파가 말하는 민생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양심이고 도덕이고 소용이 없다는 물질주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삼민주의에서 민생은 인민이 착취당하지 않고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사회의 목표를 말하는 것으로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대주의적으로 과거의 중국사람의 말을 더 무겁게 생각하고, 현재의 이 나라 사람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다.

민생이라는 말로써 목적으로 삼는 외형적 결과는 기층 민중이 윤택한 생활수준에 이르는 것으로서 비슷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체제의 틀이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중산의 민생주의는 지권(地權)평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민주주의를 통해서 달성할 것인 반면에, 박근혜의 민생주의는 재벌과 금융자본 중심의 경제와 자본친화적이고 반공적인 강력한 공권력의 존재를 전제로 약속이 된 것을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주는 개념의 민생주의이다.

그래서 손중산의 영향력 하에 있던 1920년대의 중국 국민당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진보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고, 지금 한국의 집권당은 민주주의를 회피하고 대자본에 의한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보수정당이다.

그래서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같아도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평등사회에 대한 열망이 큰 이른바 진보좌파가 볼 때는 박근혜 대통령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민생도 그렇고 경제민주주의도 그렇고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뜻이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사소통의 문제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도 존재한다.

지금 한국에는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청소년을 포함한 젊은 층과 기성세대, 그리고 노년층, 기독교 신도와 기타 종교인이 전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한 집단이 지금처럼 다른 집단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고 잘못된 사람들로 취급한다면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가 없고 유지가 되는 동안에도 고통과 손해가 많이 끼쳐질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관용(寬容)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용은 무관심과는 조금 다른 의미일 것이다. 상대방과 내가 쓰는 용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나의 이해가 상대방과도 공유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전제에서 상대방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극우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에 대한 관용은 없다고 말할 사람들이 양쪽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힘을 배경으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거나 반사회적인 파괴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는 용인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미 반공주의적인 극우 파시스트 성향은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는 많은 노년층이 가지고 있고, 이는 국가가 공권력으로 적당히 보호하면서 통제를 하고 있다. 심지어는 범죄적인 파시스트 체제인 일제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공적인 제재도 받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좌파나 공산주의도 이 사회에서 시민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불편한 휴전체제가 남과 북 사이에서 끝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작 남한 내에서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간에 적당한 타협과 휴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한 깊은 탐구와 이해가 필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급한 사안이다.

지난호 보기

*수신을 원하지 않는 분은 sngmoo@cycleconomy.org로 요청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