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연구통신

제201334호 [통권 제163호]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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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피해야 하는가?

한국의 20세기 초반의 삶을 경험한 세대들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가난한 사람을 닮아서는 안 되는 인간형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보급된 환경경영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부유한 것과 선하고 정의로운 것이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애써서 입증하려는 노력을 동반한다. 이데일리(2013.4.30)에 따르면 펀드평가사인 KG제로인에 확인한 국내 출시된 SRI펀드는 24개라고 한다. SRI펀드의 최근 6개월간 평균수익률은 4.81%로 같은 기간 주식형 펀드의 2.51%를 두 배 이상 웃돌았다. 0.25% 상승에 그친 코스피 지수와 비교할 때도 성과가 좋았다는 것이다.(김해창 지음, ≪저탄소대안경제론≫, p. 193)

SRI펀드는 미국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출발했다고 한다. 이런 기독교 정신에 충실하다 보니 부자가 된다는 논리로 연결되기가 쉽다.

기독교를 포함한 한국의 종교는 종교신앙, 곧 신심의 깊이에 따라 물질적 축복이 따른다고 보고,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한 자들의 입지를 좁히고 이들을 또 한번 소외시킨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물질적 가난보다는 부유함이 부끄러운 것이었다. 중국고대에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고사, 공자의 제자 안연의 안빈낙도,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의 가난, 무수한 선비들의 청빈한 삶, 그리고 중세 유럽 수도사들의 가난의 서약은 지금 시대의 세태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예전에도 선하고 정의로운 부자들이 있었다. 경주의 최부자집, 거상 임상옥과 같은 조선시대의 부자들이 있었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한 안희제, 그리고 직접 독립사업에 뛰어든 남강 이승훈 선생 같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부자였다.

이런 분들이 옳은 일에 뛰어든 다음에 재산이 더 늘어났다고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관계요로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이 중요한 조선사회에서 자선사업만이 아닌 정의를 위한 활동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시된다.

종교의 경우에도 종교신앙을 가지는 것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게 되는 것과 얼마만큼 관련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종교를 갖게 된 후에 술과 담배, 불건전한 오락을 끊고 더 맑은 정신을 가지고서 근검 절약하는 삶을 살게 되어 건강과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게 되는 경우는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측면과 사업의 번창, 승진과 같은 불확실한 운이 따르는 기회에서의 행운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종교에서 가르치는 윤리는 아무런 양심의 제약 없이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돌진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가 쉽다. 신심이 좋은 운을 불러온다는 믿음이 있지만, 그런 측면은 미신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신앙이 표면적인 것이든 진실한 것이든 이는 부유하게 살아가는 데 제약이 되고 신앙인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다원성이 약하고, 일원화된 지배이데올로기와 지배구조로 빈틈없이 짜인 사회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어떤 형태로든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가난과 벗을 삼아야 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바로 이런 환경이 되어 있다.

가난해지기를 맹세하는 수도사들의 서원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적당히 살 만큼 먹고 살면서 양심을 지키고 의로운 일에도 시대적 요청이 있을 때 참여하겠다고 하는 여무진 생각을 학교를 졸업하기 전이나 후의 사회초년병 시절에는 대부분이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환경경영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책임투자 같은 이슈들이 한때 귀가 솔깃하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배세력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다원적인 사회를 원하지 않으며, 피라미드형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생계의 안정을 위해서는 시비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측은지심까지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쪽으로 사회가 경직되어 갈 것이고, 이에 동조하지 못한다면 물질적 가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의 가시밭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최소한 이런 사회가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야 한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고도성장 시대에 별다른 물질적 고통에 대한 고민 없이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더 빈틈 없는 일사불란한 일극(一極) 사회로 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후배와 자식들에게 ‘그대는 가난하게 살 결심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혁명은 진정으로 황희 정승과 같이 지배기구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비가 새는 판자집에서 사는 일이 가능하여 가난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당한 것으로 인식될 때,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기는 해도 지치거나 외롭지 않은 세상이 될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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