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통신

제202223호 [통권 제256호]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 연구소

주소: 서울시 송파구 동남로 2길 18. 전화: 070-7767-5510

법 전문가들의 위기

 지난 7월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수상이 사임하던 당시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학자 마르첼로 무스토는 “전문가들”의 지배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글을 썼었습니다. 드라기는 이탈리아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의 총재를 지낸 금융전문가였습니다. 여러 정당들이 내놓는 정치색을 띠는 정책들로 시끄러운 의회정치보다는 경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과 관료들이 제대로 된 정책을 세워서 책임 있게 나라를 끌고 가리란 막연한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 스스로가 검찰이라는 관료기구의 테크노크라트 출신이면서,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고 전문가들이 원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준칙에 따라서 통치를 잘 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소임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번 미국 방문 시 벌어진 비속어 발언 보도는 다른 방향으로 논란이 번졌지만 그것이 이러한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에서 표출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노란 봉투법에 대한 반대 입장, 화물연대파업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는 듯한 강경한 태도와 업무개시명령의 발부 이런 것들도 산업계와 경제관료라는 경제에 관한 전문성을 가진다고 하는 이들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법률에 따른 공권력의 집행과 시장경제질서를 유지하는 전문기구의 판단에 의한 행정조치 같은 사고범주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주의나 법치주의에 대하여 호감을 가질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칙주의나 법치주의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 명분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어진 준칙을 고수하려는 태도는 관료들의 전형적인 태도이고,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일수록 그 위치를 이탈하지 않으려면 그런 입장을 고수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군주나 대통령이나 수상은 법이나 준칙을 그대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배반하는 일이고 무책임의 일종입니다.

화물연대가 주장하는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요구는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노동자들과 도로교통의 안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 실태를 제대로 파악해서 이미 정해진 법이라도 고쳐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정치가 할 일입니다. 공권력의 담당자와 산업계가 단합에서 산업에서 발생하는 손해만을 이야기하고 업무복귀명령을 내리는 것은 사회의 분업 체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사회적 분업이 아닌 강압적인 노예 노동 제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퇴행적인 조치를 법치의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권력에 대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바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없고 인간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도 눈을 감고 있는 답답한 아전(衙前)의 행태일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엄혹한 국제정세와 세계적인 경제전쟁의 와중에서 산업계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더욱 긴장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할 시점에 무슨 파업이나 하느냐 하는 인식이 있기에 이런 조치들이 나온다고 생각됩니다. 미국과 같은 거대 패권세력들의 힘겨루기와 줄 세우기로 초래된 국제경제의 경색을 완전한 외부 여건으로 수용하는 태도입니다. 주어진 여건 내에서 한국경제의 생존의 방도를 열어 가는 데 모두가 일심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크게 탓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협조가 가능하려면 어려운 여건에서 모두가 골고루 고통을 분담하여 흥이 나야 되는 것이지 불공정한 노사관계에서 힘을 가진 세력이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데 무조건 따라 가라고 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을 상전으로 알고 그 나라가 무슨 횡포를 부리든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면서 노동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미국이 세운 괴뢰정권, 조선총독에게나 걸맞는 일입니다.

법을 적용하여 공권력 집행하는 일에 특화된 전문 관료가 위정자의 자리에 올라서 법을 집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을 시장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독재 시스템의 위계질서에 적응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는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용인하는 자유주의 정치질서에서 성공할 수 없는 일이며 강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법률을 공부하고 법 전문가가 된 사람들을 존중하므로 우리는 사법부가 포함된 3권 분립의 헌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 전문가의 입장에서 엄격한 법 집행의 이름으로 자본과 시장의 독재를 옹호하는 정책을 계속 펼쳐 나간다면, 법률 공부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 자체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이며, 법 전문가들의 판단력에 대한 신뢰성과 그들의 양심이 가지는 권위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3권 분립의 헌정체제가 위태롭게 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좀 생각해 보고 법이라는 공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착각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재앙이며, 이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던 이들이 초래한 인재(人災)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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