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통신

제202325호 [통권 제285호]

2023년 6월 23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 연구소

주소: 서울시 송파구 동남로 2길 18. 전화: 070-7767-5510

역사와 순환의 두 차원

동양 사회의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노자는 사관(史官)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도덕경(道德經)에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으나 제왕(帝王)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사회와 역사의 운행원리들과 교훈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주희(朱熹)가 사서(四書)를 편찬하기 전에 중국에서는 역(易), 시(詩), 서(書), 춘추(春秋)가 통치자 계급의 주된 교양의 출처였던 것 같습니다. 역(易)은 천체의 운행과 계절의 변화에 대한 관찰에 기초를 둔 유비적 사고에 의해 순환과 반본(返本)의 사고와 교훈을 제시해 주며, 서와 춘추는 각각 경세(經世)의 원리들과 역사의 사실들과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시(詩)는 인간 사회의 예술적 감정과 풍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인격의 도야와 자연과 인간 사회의 균형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의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서양에서와 같은 논리적 철학적 사고와 자연과학에서 출발한 통계적 방법론에 따른 사회과학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경세(經世)에 관련된 지식체계와 학습은 전제들과 자료들을 기초로 한 논리적인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경전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거기에 담긴 지혜를 심득(心得)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인간 자체를 얼마나 깊이 있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이 경세적인 지혜에서 관건이 되고, 이 분야에서는 동양과 서양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이야기하는 인문학(Humanities)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잘 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들을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인간 자체는 몸을 가지고 있고, 이 몸은 지구 전체의 물질의 순환체계와 맞물려 있어서 그 순환의 흐름이 교란되지 않도록 물질의 투입과 배출에서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건강에 매우 중요하며, 이런 관심이 사회적으로 확장된다면 경제(經濟)에 관련된 사유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통해 다른 인간들과 계속해서 상호작용하면서 협상하고 논쟁하며, 화합하고 투쟁하고 화해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사건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 그리고 이에서 갈라져 나온 역사가 또한 사람들의 성격과 행위의 유형에 대해서 많은 정보와 가르침의 원천이 됩니다.

이처럼 순환 그리고 역사 또는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을 잘 알게 해 주는 두 축이 됩니다. 고대의 위정자에게 중요했던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는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순환체계를 알게 해 주는 지식을 말한 것이고, 병법(兵法)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침략해 온 수나라 대군의 장수 우중문에게 쓴 시에서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라고 조롱했습니다. 이 순환의 지식체계가 근대 서양에서 경제학과 생태학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옛날이야기에서 더 사실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교훈을 끌어내는 쪽으로 발전한 역사 분야에서는 사관(史觀)에 따라 다르게 보기는 하지만 어떤 불변의 법칙보다는 당시마다의 특이한 성격의 인물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우연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더 중심이 된다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원리를 밝혀내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인문분야에 속한 것으로 자리매김이 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근대의 주류 사관은 역사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보도하는 데 중심을 두고 역사 자체가 말해 주게 한다는 실증주의 역사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몸을 가진 인간들이 펼쳐가는 것이기에 몸과 관련된 자연적인 순환의 질서는 여전히 역사에서도 관철될 수밖에 없으며, 독특한 역사 이야기들 중에서도 면면히 흐르는 경제적 세계의 질서와 변천들이 그 기저에 있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 유물사관이란 역사관입니다. 이 유물사관은 역사를 설명하는 요인으로서 물질적인 순환의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을 과학의 수준으로 승격시키고자 했고, 사회과학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현상의 우발적 성격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이를 설명하는 기초적 요인으로서 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이 역사관을 대부분은 수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제학은 그 자체가 시장과 자유로운 인간, 임금제도, 사유재산 등의 사회제도상의 개념을 전제로 삼고 인위적인 순환의 질서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체계를 세워 왔지만, 경제학사 상으로 그 이론체계가 사회 시스템의 진화에 따라 계속 달라져 왔고, 사회 제도도 불변의 것이 아니어서 이런 전제의 변동을 감안한 경제사가 경제이론보다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더 쓸모 있는 경제적 사고를 가능케 해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생태적 기후적 재앙을 앞둔 위기의 시대에 지구상의 물질순환 구조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 대사를 둘러싼 상호작용은 불변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달라져 왔기 때문에 지구상의 인간사회의 생태학적 패턴의 변천에 대한 역사가 경제사와 함께 지금의 상태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절실하게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환경사나 생태사 분야가 지리학,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점점 더 중요해지는 추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실물 분야의 제도나 인간 행태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인간 개인과 세계 자체의 물질 순환적인 기초에 대한 파악이 서로 상승작용을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관념적인 사고를 잘 해서 순환적인 구조를 이론적 도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이용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고, 과거와 현재의 사실들에 대한 자료의 축적과 면밀한 관찰, 경험을 중시하고 이론적인 도식화를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세 종류의 경제학”이란 책에서 규범경제학과 질서 부여적 경제학, 그리고 이해적 경제학을 구분했으며, 이를 통해 자연과학적인 이론적 접근과 역사적인 접근의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궁극적으로 정신과학적인 이해경제학을 유력한 답으로 내놓았습니다.

지금의 경제 체제의 불안정성이 체감되면서 불변의 전제조건들을 상정한 경제학 이론들은 점점 힘을 잃고, 역사적인 접근방식이 점점 유력해져 가게 되며, 시장의 화폐 금융의 순환구조보다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물질 순환의 구조에 대해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해집니다. 그리고 지금과 과거의 문명과 문화를 불변의 것이 아니라 진화해 가는 체계로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것이 현재의 위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좀바르트의 이해경제학은 지금의 주류 경제학보다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순환의 경제학이라는 것도 기존의 몰역사적이고 도식적인 자연과학적 도구들을 무비판적으로 과잉 사용하는 경제학이 보지 못하는 부분들을 잘 짚어보기 위하여 사용가치라고 하는 물질적 기초들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의 생태위기에 대한 시각과 사고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물사관이 좌파나 공산주의 사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낙인찍혀 옴으로써, 사회과학에서는 그 긍정적인 측면들까지 완전히 도외시함으로써 현실의 장기적인 발달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런 낙인찍기의 시효는 끝났다고 보므로, 버려진 부분들을 다시 살펴보고 취할 부분들을 살려내는 것이 시급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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